이야기/글모음

가을유서- 류 시화

평창강 2005. 10. 12. 20:52


 
 
가을엔 유서를 쓰리라
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
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눈꺼풀 위에
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
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
나 유서를 쓰리라
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
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
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
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
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
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
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
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
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
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
내 유서를 소리내어 읽으리라
 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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